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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대학교 백병원 법인 로고  사진입니다 인제대학교 백병원 법인 로고  사진입니다

백병원의 시작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이자 선각자, 백인제

백인제 박사는 1899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재학 중에는 3·1 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고 퇴학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후 복학이 허용되어 1921년 경성의전을 수석졸업 했음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의사면허증을 주지 않았다. 결국 2년 동안 총독부의원에서 무보수로 일한 후에야 의사면허(제537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경성의전 외과교수를 역임했으며, 1928년 조선인 최초로 외과 주임교수가 되었는데 이것은 식민지의 청년이 실력 하나로 그 당시 의학계에서 인정받은 대사건이었다.

  • 경성의전 교수로 임용된 직후의 사진(1928년경)
  • 백인제가 박사학위를 통과하고, 경성의전 외과 주임교수가 되었다는 신문기사 (1928.3.12. 동아일보)
  • 경성의전 졸업앨범에 실린 백인제 박사의 임상강의 사진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앨범 실린 사진(1942년경)
백인제 박사는 1928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에 통과하고 같은 해 6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주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유일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로 경성 의전 주임교수가 되었다. 사진은 1942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것이다.

백인제 박사는 우리나라 현대의학, 특히 내장외과와 수혈분야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간 선구자였다. 그는 1937년 상부 장관을 복벽(腹壁)에 유착시켜 장루(腸瘻)를 형성해 줌으로써 장관을 감압(減壓)시켜서 폐색된 부분을 통하게 한 성공사례 7례를 보고하였다. 세계 최초로 상부장관(上部腸管)의 감압술(減押術)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렇듯 백인제 박사는 진단과 수술이 정확하여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만주에까지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백인제 박사 앞에 백인제없고, 백인제 박사 뒤에 백인제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뛰어난 명의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의술을 통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애국자요 선각자였다. 민족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직분을 활용하여 후학들에게도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백병원을 세웠고, 이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다.

1941년 ‘백인제 외과병원’ 개원

특출한 의사였던 백인제 박사는 그의 스승 우에무라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우에무라 준지(植村俊二)는 1916년 우리나라에 와서 총독부의원의 외과과장을 지내다가 1924년 지금의 서울백병원 자리에 자신의 병원을 세워 운영하였는데 부인이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고향인 나고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에 병원을 인계받을 적임자를 찾던 중 경성의전 학생시절부터 총애하였고, 특히 총독부의원에서 능력과 인품을 확인하였던 백인제 박사에게 병원을 넘기기로 한다. 당시 교수였던 백인제 박사의 수중에 병원을 인수할 만한 거금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조선식산은행(현 조흥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30병상 규모의 외과병원을 인수할 수 있었다.

백인제 박사는 병원 인수한 후에 후배 이병훈 박사로 하여금 병원을 경영하게 하고, 당신은 계속 교직에 계속 남아 있었다. 백인제 박사가 직접 병원을 운영하게 된 것은 1941년,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침략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던 해였다. 한국은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하고 있었고, 그리고 인수한 병원의 빚도 갚지 못한 상황이었다. 1941년 1월 24일부터 ‘백인제 외과병원’ 간판을 내걸고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백인제 박사가 직접 경영에 나선 후 환자가 몰리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경성의전 김희규, 주영재, 유덕선 박사 등 후배, 제자들이 의료진으로 동참했다.

  •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
  • 수술실과 진료실이 있던 신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 1942년 증축공사 중 기념촬영
  •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던 백병원
백인제 박사가 개업했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병원은 언제나 환자들로 붐볐고, 개원 초기에는 30여개였던 병상은 연일 꽉 차서 병원에 인접한 주택을 병실로 개조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듯 백인제 외과의원은 날로 번창하여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약 4년 동안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조선팔도나 만주에서 연일 몰려드는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병원을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최대 100병상까지 확대하여 해방직후 사립병원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국내 최초의 개인병원의 재단법인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자 백인제 박사는 민족과 나라를 위해 선각자다운 면모를 보인다. 그동안 병원을 하면서 모았던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46년 11월,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이사 겸 초대 원장에 백인제 박사, 상무 겸 부원장에 김희규 박사, 재단 설립 당시는 물론 백인제외과병원 개원때부터 백인제 박사의 행정적, 법률적 자문을 맡아왔던 백붕제 변호사, 그리고 박사의 경성의학전문학교 후배이며 성모병원 원장으로 봉직했던 박병래 박사,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였던 기용숙 박사가 이사로 선입되었으며, 감사는 공병우, 백기호 박사로 구성되었다.

정관에는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아래 인술로서 겨레와 인류를 구한다는 것, 의학연구와 교육,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을 통해 나라와 겨레를 구할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을 목표로 설립의 취지를 밝혔다. 바로 이 뜻을 받들어 1979년에 인제대학이 설립되었다. 백인제 박사는 가진 자들의 베풂에 대한 사회적 책임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후손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이런 나눔의 실천이 지금의 인제학원과 재단법인 백병원까지 내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1947년 1월 1일 경향신문. 백인제 박사가 백병원을 재단법인으로 한다는 보도기사
  • 백병원 본관

1954년 국내 민간병원 최초 ‘백병원 혈액은행’ 개설

해방 전까지만 해도 혈액은행이나 보존혈액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 채혈자가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했고, 채혈자의 혈액을 링거씨액에 희석 여과한 후 보온하면서 수혈하였다. 그러나 이 수혈방법은 오한, 전율, 발열 등의 부작용 때문에 점차 직접수혈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즉, 채혈자로부터 직접 주사기로 채혈하여 바로 환자에게 수혈하는 방법이었다.

백인제 박사는 외과수술을 위해서는 수혈에 대한 연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고, 그 자신의 첫번째 연구인 「일본·한국인 사이에 있어서 혈액속별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 등을 비롯하여 수혈 관련 논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는 등 백인제 박사는 수혈분야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 외과 강사였던 장기려 박사에 의하면 백인제 박사는 수혈과 공혈자(供血子)제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수회의의 승인을 얻어 수혈협회를 경의전 외과교실 내에 두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수혈조직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의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 매일신보는 1931년 12월12일부터 18일까지 6회에 걸쳐 백인제 박사의 통속의학강연회 ‘수혈’ 강연을 소개했다.
  • 백인제 박사는 일찍부터 수혈의 필요성이나 혈액은행의 설립을 강조했다.
당시 외과전문 병원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백인제 외과의원에는 하루 평균 4∼5건, 많을 때는 10여건 이상의 개복수술 환자가 있어서 언제나 혈액수급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이러한 혈액수급의 문제를 자체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윤덕선 박사를 미8군 121병원의 협조를 받아 혈액은행 실무훈련을 받게 하였으며, 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백병원 1층에 있던 검사실에 붙여서 혈액은행을 개설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병원 혈액원이다.

처음에는 미군병원의 협조를 받아 혈액을 얻어다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차차 매혈로 자체수요를 확보해 나갔다. 채혈과 검사 및 조작 등은 모두 윤덕선 박사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으며, 후에 검사실에 근무하는 요원들을 훈련시켜 일을 맡겼다.

혈액원의 시설은 혈액을 채취해서 보관하고 검사하는 최소한의 시설 밖에는 없었고 그나마도 정전(停電)이 잦아서 혈액이 변질될까봐 애를 태우는 경우가 많았다. 국립혈액원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시내 병원들에 필요한 혈액을 충분히 공급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백병원 혈액원에도 일반 병원들의 혈액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당초 백병원 혈액은행의 설치의 목적이 자체에서 소요되는 혈액 확보를 위한 것이었으나 할 수 없이 다른 병원에게도 다소의 혈액을 공급해주기도 했다.

백병원의 혈액원은 국립혈액원에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생겨난 사립병원의 혈액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정부에 의해서 1954년 6월 7일에 국립혈액원이 개설되기 앞서 1954년초 민간병원으로서는 백병원에서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한 것이다.

대개의 병원들이 국립혈액원, 그 후에는 적십자혈액원에서 필요한 혈액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한데 비해, 한 외과 전문의를 훈련시켜 혈액은행을 개설하고 자체에서 직접 혈액을 확보하는 적극적인 해결방법을 택한 백병원은 그 이후에 생겨난 많은 다른 사립병원 혈액원들의 표본이 되었다.